나에게는 똑똑한 남동생이 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머리좋은 동생은 어린나이에 1고등에 높은성적으로 붙었다.
대대로 농사꾼인 우리집안에서 수재가 나오자 우리가문이며 온동네가 너무나 신기해하였고 1고등선생들마저 농촌에서 보기드문수재가 왔다고 칭찬을 아끼지않았다.
나는 펑펑이가루 10키로정도를 한달에 한번꼴로 동생에게 날라다 주곤했는데 고난의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펑펑이가루를 만들어 동생에게 보내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펑펑이만들려고 언제올지모르는 전기를 기다리느라 막연하게 줄서야하고 가루만들려고 가루칸에가서 또 줄서서 기다려야하고. 그렇게 만든 펑펑이가루를 메고 20리되는 역전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또 기다려야하고.
한번은 동생과 함께 가던중 펑펑이가루를 메고있는 동생을 기차안의 의자에 앉혔더니 어둠을 이용하여 날래게도 동생의 배낭을 칼질하여 펑펑이가루를 통채로 날치기 당하고… 또다시 펑펑이가루를 힘들게 만들어 오던 일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날 동생은 같은반친구들이 역전에서 기차를 타러나갔다가 수많은 인파에 깔려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생겨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눈물바다가되였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가족은 동생이 항상 무사하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또빌었다.
펑펑이가루 만드는게 어렵지만 미공급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배부른 흥정이 되여버렸다. 농촌에서는 뼈빠지게 일시키고는 아무런 분배를 주지않아 동생에게 펑펑이가루는 고사하고 우리가족들 입에 풀칠조차하기 어려워졌다. 그 어려운속에서도 동생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때 나와동생은 대학에서 고향까지 장사를 조금 했는데 2탕정도 더하면 1년동안 대학에서 지낼비용이 될것같아서 장사를 좀 하고 동생은 개학날자를 훌쩍지나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니 웬걸~~대학교수님들 모두 동생보고 어디있다가 이제야 왔느냐. 기다리다못해 퇴학이 결정됐다고 하였다. 대학교수님들은 1년후에 다시 입학해서 오는방법밖에 없다고. 반드시오라고 하였다.
그 시절 “펑펑이 가루”, “속도전가루” 등으로 불리며 많은 추억을 만들어 낸 소울푸드중 하나였지요.
얼마전에도 고향분들이 모여서 같이 만들어 먹어보았지만 역시나 배고픔에 눈물과 같이 섞어먹던 그 맛에는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편해지면 입맛부터 먼저 변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