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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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어 6번째 수업이 끝나자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회색 적의대복을 입은 담임 선생이 2반 교실로 들어왔다. 떠들다 말고 삽시에 조용해진 학생들을 향해 선생은 공지를 내렸다.

“오늘 저녁은 우리 반이 경비 설 차례입니다. 학급 동무들 모두 나오도록 하시오. 7시부터 모이니 늦지 말고.”

중학교에 올라와 처음 서는 학교경비라 아이들은 생소하기도 하고 반 동무들과 저녁 늦게까지 놀면서 친해진다는 생각에 새삼 들뜨기도 했다. 이윽고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저녁노을이 짙게 드리우자 학교 마당에는 경비 서로 나온 2반 학생들이 신나게 웅성거렸다. 저녁식사를 마친 선생들이 학생들을 경비실로 모이게 했다.

“ 자~ 1학년 2반, 이제는 오락회 시간입니다. 모두 노래 한곡씩은 알고 있겠지? 못해도 2절까진 불러야해~”

나이가 든 선생 한명이 말하자 담임선생은 맨 먼저 노래할 학생으로 키 꺽두룩 하고 훤칠한 남자애를 짚었다. 류성은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생각나는 노래를 거침없이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류성에게 담임선생은 다음 순서로 노래할 녀학생을 꼽으라고 했다. 그는 녀자애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후, 학급에서 꽤나 세다 하는 경주를 지명했다. 난데없이 지명 받은 경주는 속으로 ‘왜 날 꼽은거야?’ 라고 아니꼬와 하면서도 겉으론 내색없이 일어났다. 머리 숙여 인사한 경주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첫 소절을 떼었다.

조국은 나의 고향 금나락 설레던 땅
조국은 나의 공장 못 잊을 나의 일터

그 어떤 반주 악기도 없고, 록음기나 중폭기도 없는, 그저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는 소박한 독창이었다. 학급 동무들과 선생들이 조용히 듣고 있는 가운데 경주의 노래는 여름밤의 매미소리와 바람소리를 가르며 고요히 울려퍼졌다. 노래는 1절이 끝나고 2절로 이어졌다.

조국은 선렬들의 붉은 피 스민 땅
조국은 목숨 바쳐 지키는 나의 고지
내 너를 빼앗기고 또다시 노예 되랴
아 귀중한 조국은 내 삶의 전부여라

노래를 마친 경주는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학급 동무들과 한창 노래랑 음악에 관심을 갖고 열을 올리던 경주는 아는 노래가 꽤 있었다. 그런데 유독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고, 저절로 암송된 노래가사를 모두 앞에서 부른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들어온 노래, 그래서 성심을 다해 부른 이 노래의 가사가 새삼 경주의 머리속을 맴돌았다.

조국… 할아버지 조 祖, 나라 국 國. 한문시간에 배웠던 뜻이 생각났다. 이제 갓 중학교에 올라온 만 11살 아이에게 조국이란 할아버지의 나라. 조상때부터 대대로 살던, 선조의 태가 묻힌 곳이라는것 하나로 충분했다. 조국이란 두 글자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모습들. 그 갈래많은 력사에 얽히고 섥힌 자랑스럽고도 가슴아픈 모순들… 그 속에 묻힌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와 자신의 가족이 살아온 자취를 리해하기에는 너무 이른것 아닌가! 시간이 흐르고 경주가 어른이 되어가면 그는 알게 될것이다. 경주가 노래한 조국은 그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리라…

… … …

학교 경비날은 철부지 중학생들에게 즐거운 오락회와 더불어 진한 추억을 남겼다. 그 다음날 1학년 학생들은 다가오는 학기말 시험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북적거리는 2반 교실에서 력사 답안을 복습하던 경주는 문득 어제 불렀던 노래가 떠올랐다. 영화 <> 에서 나오는 노래. 무심결에 가사를 더듬으며 경주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에 정말 금은보화가 많은걸가?…’

이제 중학생인 경주는 이담에 커서 일군이 되면 그가 일할 공장과 일터는 어떤 곳일지 호기심이 났다. 선렬들의 피… 그렇다. 피가 많이 스민 땅이다. 오천년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이지만 그만큼 피어린 전쟁과 고난을 겪은 땅이 아닌가! 이제 력사를 배우기 시작한 경주는 모르는것이 많다. 나라를 잃어버린다는건 무엇이며 지킨다는것은 무엇인지 배우게 될것이다.

한동안 생각의 기차를 타고 있던 경주는 다시 답안지에 눈을 돌렸다. 복습용 학습장들과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글자 글자 빠짐없이 목이 터져라 외우는 소리, 검은 칠판에 흰 가루를 묻히며 부딪히는 백묵소리, 그 와중에 딴장난 하며 떠드는 애들 소리… 그리고 저기 두번째 줄에 앉은 학생의 머리속으로 내물처럼 흐르는 노래에 대한 생각.

온화한 초여름날답게 한없이 소박하고 평범했다. 바깥 세상이야 어떻든 아이들은 아이들이니. 적어도 경주에게는 그랬다. 뭘 놀아도 재미있고, 또래 애들과 같이 있는것만으로 웃을 일이 많은 시절. 그래서 더 밝고 찬란한 모습… 이 모습도 누군가 무심히 생각하는 조국의 한 부분인가?… 아이들의 복작거림으로 가득찬 교실 창가에 따스한 빛이 비추었다. 똑딱이는 시계바늘이 정오에 다가가더니, 또 하나의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맑게 개인 6월의 하늘가로 아득히 울려퍼졌다.

1 thought on “반짝이던 날들”

  1. 학교경비서러 나와서 고구마 궈먹고 친구들이랑 통기타치며 밤새며 노래부르던 기억이 나네요. 코털도 안 나온 나이에 술이랑 담배랑 배운것도 그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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