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월 초 하 루
아득히 남쪽 하늘에 머물던 해는 서서히 움직여 서쪽으로 기울어갔다. 오후 5시가 거의 되어갈 무렵 장마당엔 래일을 준비하러 나온 사람들과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팔려하는 장사군들로 여느때 없이 복작였다. 별로 기억에 안 남는 평범한 날들, 극히 가슴에 파고들어온 힘겨운 날들, 또 생각지 않게 기뻤던 날들이 모이고 지나서 이렇게 한해가 흘렀다. 삶의 희로애락을 가득 쌓은 올해는 마지막 날에 와서 몇시간을 남겨둔채 다음해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사연 많은 한해를 잘 마감하고 다가오는 새해 첫날을 잘 맞이하려고 나온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채워진 한해에 담긴 아쉬움과 뿌듯함, 새로 시작하는 래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설레는 저녁. 할머니와 함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경주도 같은 마음이다. 장마당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남새를 펴놓은 보따리들이 줄을 지었다. 배추, 무우, 파, 감자, 고추, 콩나물과 시금치가 여느때와 달리 잘 팔린다. 남새 줄을 지나니 쌀과 량식 마대들이 보였다. 강냉이쌀, 보리쌀, 강냉이 국수, 메밀국수, 입쌀, 찹쌀, 두부콩, 팥자루들이 량옆에 일직선으로 늘어진 가운데 사람들이 붐빈다. 오늘은 강냉이쌀보다 입쌀이 더 많이 팔리는듯 하다. 떡을 치려고 찹쌀과 팥을 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 옆으로 수산물과 고기매대가 이어졌다. 저기 자주색 양복을 입은 부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기를 상당히 많이 사가는듯 하다. 좀 산다 하는 가정의 부인들이 과일가에 가서 겨울에 드문 과일들을 고른다.
오늘 장마당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어제밤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하얗게 된 장거리에 저울 다루는 장사군 아낙네들, 옆에 도와주러 나와있는 나그네들, 쪼금 더 깎아달라 흥정하는 사람들, 엄마 팔 붙잡고 간식 사달라 조르는 아이들, 저기 개울 건너편에 사는 철이 엄마, 온 동네가 잘 아는 시안전국 지도원 부인, 가정 형편이 곤란한 영심이네 식구들, 이 바닥에 유명한 저 골동장사군이며, 집없이 돌아다니는 아무개랑 여기 장마당 길에서 사는 꽃제비들도… 장에 온 김에 열심히 먹고 있는 사람들까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할머니를 따라서 이것저것 사들고 장을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달빛이 드리우는 저녁이 되었다. 곳곳에 전지불이 비춰지고 집으로 향하는 발길들이 부지런해졌다.
장을 보다가 동네 반장아주머니를 만난 할머니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옆에서 심심해진 경주는 우연히 장마당 구경을 오래 하게 되었다. 이해 마감날이라 미련없이 장사짐을 싸서 퇴근하는 녀인들이 있는가하면, 엷어보이는 동복에 군대 동화를 신고 마우라를 머리에 감은채 얼어드는 손으로 전지불을 번갈아 들며 서있는 녀인들도 있다. 심지어 그들중에는 어린 자식들도 곁에서 떨며 서있는다. 설명절 전날밤까지 하나라도 더 팔겠다고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저들 역시 새해를 잘 맞으려고 최선을 다하는것이리라. 그럼 엄마 또는 아버지 옆에서 도우미가 되주는 아이들… 가엽기도 하고 용하기도 하다. 아마 저들에게는 오늘 같이 춥고 고단한 날이 처음이 아닐것이다. 매일이 똑같은 생활임에도 설날에 대한 기대로 눈빛이 반짝이는것은 자신들도 모르게 저들안에 자리잡은 희망때문일것이다. 새해에는 뭔가 좀 나아질거라는 한줄기 희망…
이 희망은 어쩌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간직된것이 아닌가 싶다. 평범한 로동자 농민,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시내 중심지 광장 앞에 사는 사람, 집이 없어 동거사는 사람, 오늘 하루 목숨을 련명하는것이 전부인 거지들과 가족이 없어 의지가지 할곳이 없는 고아들, 복무지에서 혹독한 훈련속에 사는 하바닥 군대들과 돌격대원들, 심지어는 바깥 세상을 볼수 없는 감옥의 죄수들까지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 누구 아버지도, 성공의 탄탄대로를 걷는 시안정국 정치지도원도, 팔갑을 바라보고 있는 로인네도, 세상만사 알리 없는 철부지 아이도. 이 모두에게 새해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가 차오르는 미지의 희망이자 어제는 실패했더라도 다시 새 출발 할수 있는 기회, 조금이나마 인간다운 식탁을 마주하며 기뻐할수 있는 리유이다.
이런 삶을 알리 없는 누군가는, 그 가정에 먹을것과 입을것, 가구와 모든것이 차고넘쳐 살만한 인생인 사람은, 저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물을것이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 힘이 날가? 무슨 맛으로 설을 보낼가? 눈 감는게 차라리 편할지도 모를만큼 사는것 자체가 고생인데… …
아마 지극히 옳은 질문일수도 있다. 왜냐고? 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보리밥에서 강냉이 국수면 그나마 낫고 심하면 강내죽이 전부인것. 몇년 혹은 몇십년 그렇게 살아도 다른것이 없는 생활. 장마당 모퉁이 구석과 저기 해청교 다리 밑이 잠자리인 삶이 몇년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대로이며, 래일이라고 달라질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삶의 목적이나 꿈은 커녕 삶을 유지할 식의주도 모자라서 필사적인 하루하루. 그런 지친 고단함속에서 마음을 다잡으며 새해를 바라보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저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힘이 있다. 인생의 한치앞이 캄캄하지만 헛된 희망일지라도 그 불이 꺼지지 않은것. 자신의 삶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가난이라는 사회적 침울속에서도 그들만이 바라는 소원이 살아있으며, 설사 그 소원이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르기에 더더욱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이다…
“아이구 반장, 새해에는 모든것이 잘 되길 바라네… 다음주 반모임때 보자구~
경주야, 얼른 집에 가자.”
반장아주머니와 인사를 마친 할머니가 경주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할머니는 김장날 담근 동치미도 꺼내고 래일 새벽 떡을 칠 찹쌀도 불궈 놓을것이다. 경주는 설날을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기도 했고, 오늘 보았던 장마당 구경에 의아하기도 했다. 여러가지 생각이 스치고 겹치는 가운데 아까 낮에 텔레비에서 봤던 화면음악 노래가 떠올랐다.
굽이굽이 머나먼길 홀로 걸을때
바람 부는 험한 령길 나홀로 넘을때
남몰래 살펴준 그 손길 내미처 몰랐네
아 내운명 지켜준 어머니 품이여
… … …
오늘 밤이 가고 아침이 되면 신년 정월초하루다. 새벽부터 집집마다 굴뚝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장작 패는 소리, 가마 끓는 소리, 떡치는 절구 소리, 명절을 맞아 신이 난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 설눈이 하얗게 덮인 길거리로 세배돈 주머니에 쥐고 으쓱해서 걷는 중학생들, 색동저고리 입고 연을 날리는 아이들, 설공연에 나가는 학생들. 경주네 반에서도 현경이랑 몇몇 동무들은 광장쪽에서 “단심일세 단심일세 우리 모두 단심일세” 노래 맞춰서 오색천 한자락씩 잡고 춤을 추겠네.
길거리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라고 쓴 장식들과 색갈 고운 풍선들을 매놓은 사진대가 설분위기를 낸다. 래일 나가서 사진이나 찍을가?…
텔레비에는 새해기념공연이 방영된다. 시내 선전부에선 올해 신년목표와 70일 전투 선동이 떠들썩할것이다. 지나가는 아저씨들은 핀잔을 놓겠지.
“거 뭐, 맨날 해봤자 소용없는 전투. 50일 전투, 100일 전투, 인민생활향상은 무슨. 에구~ 사람들 고생만 더하게 생겼네…”
래일 아침 동이 트고 해가 뜨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도 솟아 오를것이다. 올해는 가뭄이 덜하고 홍수도 안 나서 농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방송에서 외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직장 배급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세대주들, 새해에는 공부 더 잘하고 동무들과 좋은 시간 보내기를 기대하는 아이들, 올해는 단속이 덜 심해서 장사를 맘편히 해보기를 바라는 어른들, 어떻게 하나 새해에는 비가 새지 않는 집으로 이사하길 바라는 가정, 작년보다 당과 수령에 더 이바지하길 결심하는 한 당원. 올해는 남편이 승진해 올라가기를 바라는 정치지도원 부인, 이번 1, 2월은 너무 혹독하게 춥지 않기를 비는 꽃제비들과 군대들, 그저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이어가기만을 바라는 고아들…
어쩌면 지극히 낮고 소박한 바램일것이다. 이들의 삶이 과연 가치있는 인생이냐 묻는다면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삶을 선사한 신이라는 존재가 저들이 이 땅에서 살아있도록 허락한것이라면… 그토록 초라한 인생도 진정 살아갈 가치가 있는것이다. 적어도 생명을 준 신이 그 목숨을 거두어가지 않은것은 저들 한사람 한사람이 설사 벌레같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살아있어야 할 리유가 있기때문이 아닐가? 신기하게도 저들은 이 사실을 모르지만 꿋꿋이 열심히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대단하다고, 강하다고 말할수 있다. 또한 확실한것은 삶의 어떤 풍파를 마주한대도 기어이 헤쳐나가도록 저들을 밀어주는 힘이 있다는것… 저들안에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 힘은 필경 기적이라는것이다.
별빛이 깊은 밤, 자정 12시. 새날을 알리는 시계추가 울렸다. 이제 곧 정월초하루의 동이 튼다. 새해를 축하하는 첫 아침빛과 함께…
너무 어려서였었는지 철이 없어서였는지 그냥 새해가 좋게만 기억되네요~ 부모들이 뭘 끓여먹을까 속이 타는지도 모르고.
아침이면 친구들과 함께 술병을 차고 선생님집에 찾아가 술잔을 따라 세배인사를 드리고 나머지술과 음식을 가지고 따로 모여 노래부르고 춤추며 놀던때가 어제같은데. 참 그때 그 친구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