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중에 가장 추운 소한-대한이 지나고 눈보라도 잠잠하여 어쩌면 아늑한 2월. 내가 여섯살쯤 되던 해에 음력설은 2월 중순쯤이었다. 명절 전날 곱게 내린 눈이 하얗게 옷 입힌 거리에는 햇솜같은 눈가루들이 해빛에 반짝이며 공중으로 흩날렸다. 국가에서 주던 배급은 멈춘지 오래됐고 직장 출근해서 타는 월급이란 한 사람 먹고 살아가기에도 빠듯한지라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어른들 사정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조부모님께 맡기고 늘 나가 사셨다. 전에 해왔던 외화벌이 장사가 잘 안되는지 뺏기기도 하고 빚도 지게 되어 아버지는 명절이지만 부모님 안전에 올수가 없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날 나만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향했다.
낮에는 명절 분위기로 벅작거렸던 시내가 저녁이 되니 무척 고요해졌다. 늦은 시간이지만 “설명절을 축하합니다” 라는 문구와 고무풍선들로 장식된 사진대들이 가끔씩 시내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말없이 걸음을 내딛던 아버지는 나를 이끌고 사진대 앞으로 가셨다. 도로 신호등빛 밖에 없는 거리라 사진대의 연들과 풍선색갈이 선명하게 각색되고 별들이 살며시 반짝이는 하늘가로 눈가루들은 여전히 날아올랐다. 콩알만한 딸애를 옆에 앉히고 웃음짓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인생의 고단함을 달래려 술을 마신 얼굴은 슬픔과 미소로 얼룩져있었다. 말못할 어려움이 많은데 여섯살난 애한테 말할수도 없고 슬픈 기색을 차마 보일수도 없어서 그냥 미소만 짓던 아버지 얼굴. 부모님께, 그리고 딸에게 떳떳한 모습이 못되어서 그러셨을가? 나는 뭣모르는 애였지만 알고있었다. 아버지가 몹시 고생하고 있다는걸. 그토록 힘겨운 시절, 애써 웃으며 남긴 설날 저녁의 사진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 나에게 잊지 못할 사진이 되었다.
그 후 내가 열살쯤 되던해 우리 식구들은 설맞이 공연을 보러 도예술단 극장에 갔다. 여느때와 달리 관객들로 꽉 차있었던 그날. 공연이 한창 진행되던 중간에 도쪽으로 유명한 남성가수가 독창을 하러 무대에 들어섰다. 그는 화음의 굵직한 목소리로 “춘향전”에 나오는 “광한루로 어서 가자”를 불러 온 극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기가 난 관객들이 열렬한 박수를 치며 재청을 외치자 그는 인사를 하며 다음곡을 이어갔다.
추억의 돛을 달고서 저멀리 올라가보니
곡절도 많은 내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노래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이 속으로 따라 불렀다. 곡절많은 아버지의 인생을 노래가사가 대신 표현해주는듯… 누구에게 터놓을수 없는 속상함을 아버지는 이 노래로 푸는듯이… 노래가 후렴에 들어서 청중이 같이 따라부르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한쪽 손을 높이 들고 열심히 부르셨다.
인생의 길은 멀어서 때로는 주저 앉아도
…
3절까지 노래가 이어지는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화 “곡절많은 운명”에 나오는 노래 “못 잊을 나의 길”은 아버지의 주제곡이었다.
삶이 더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랬건만, 어떻게든 일떠서려고 애타게 노력했건만, 아버지의 삶에는 더 큰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풍랑 세찬 인생의 닻은 과연 어디로 향했던걸가? 아버지 주위의 동갑내기 친구분들이 하나둘 사라지는걸 보면서 겉잡을수 없는 파도가 우리도 집어삼킬것인지 두려웠다. 하지만 그 사나운 파도속에 치이고 밀리면서 우리 가정은 기적적으로 살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부르신다. 조금은 많이 다르게…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을 포구는 어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었네